정석우의 작업은 최근의 회화가 잊고 있었던 장(場)에 대한 기억을 환기시킨다. 서너 개, 혹은 열 개 이상의 캔버스를 이어 붙여 제단화(祭壇畵)를 연상시키는 형태의 거대한 회화의 장을 펼친 후, 자유자재로 거침없이 내면의 에너지를 쏟아낸다. 우주를 움직이는 거대한 에너지의 흐름은 정석우의 화면에서 때로는 거대한 소용돌이로, 때로는 용솟음치듯 분출하는 기운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화면 위를 종횡무진하는 강렬하고 힘찬 선들의 움직임은 그 자체로 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하며, 장식물로 전락해버린 최근의 회화작업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어떤 ‘회화적’ 즐거움을 제공하기도 한다.

여기에 정석우는 신화적이고 종교적인 요소들을 참조해 이 강렬하고 거친 회화적 에너지의 흐름을 더욱 기념비적인 규모로 확장시킨다. 우선 시각적으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제단화에서 흔히 보아왔던 삼면화(triptych)의 형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의도이다. 실제로 정석우는 자유로이 붓을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캔버스를 열두 개까지 자유자재로 연결하여 대형 화면을 구축해내고 있는데, 이러한 시도는 높게 치솟은 가운데 부분을 중심으로 대칭을 이루는 거대한 제단화의 형태를 부수적으로 완성해낸다. 화면의 축을 이루는 가운데 부분은 정석우가 자신의 작업에서 특히 탐색해왔던 에너지의 흐름이 폭발하듯 분출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며, 신화적이고 종교적인 공간의 정점을 시각화한다. 이러한 화면의 형태적 구성과 더불어 작가가 선택하는 제목이나 모티프들 역시 신화적이고 종교적인 요소의 참조에 힘을 보탠다. <내가 기억하는 박동>(2012), <다음 생을 기대한다>(2011), <볼천지>(2010), <일곱 단계 피라밋>(2009), <Universe>(2008)와 같은 제목들은 화면을 뒤덮은 검은색과 강렬한 원색의 거친 선들이 형상화해내는 원초적이고 시원적(始原的)인 풍경 속에 신화적이고 종교적인 원형(元型), 절대적인 것에 대한 동경과 같은 것들을 암시하고 풀어내며 정석우의 회화를 거대한 규모로 확장시키는 내용적 요소로 작용한다.

결과적으로 정석우는 이렇게 확장된 규모에 대한, 혹은 거대서사에 대한 관심이 암시되는 태초의 풍경들을 만들어내는데, 이것은 요즘 주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회화작업들과는 상이한 어떤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최근의 회화에서는 장식적인 기능에 매혹되거나 작가의 내밀한 사적 감정에 사로잡혀 끝없이 자기 안으로만 침잠하는 경향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작업들은 대부분 회화적인 실험과 도전을 고민하기보다는 눈을 사로잡는 이미지를 양산(量産)하는 것에 몰두하거나 얄팍하고 식상한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복제하고 재생산하는 것으로 귀결되기에, 최근의 시도에서 회화라는 매체에 대한 고민이나 선택에 대한 작가의 진정성을 발견해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더우기 외적이고 시각적인 측면에만 주력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의 흔적은 거의 드러나지 않고, 심지어 외적이고 시각적인 측면에 대한 과도한 열정조차도 새로운 것에의 실험과 도전이 아닌 때이른 매너리즘의 모습으로 드러나 때때로 당혹감을 안겨주곤 한다. 결국, 이러한 상황은 작업을 통한 유의미한 발언은 물론이고 작업을 통해 사회와 역사를 인식하고 통찰해내려는 고민의 부재로 이어지며, 이것은 다시 건강한 담론을 생산해내지 못하는 젊은 미술계에 대한 우려를 자아내는 것으로 고스란히 연장되고 있다. 그래서인지, 최근의 경향과는 전혀 다른 감각에 기대고 있는 정석우의 작업을 바라보고 있으면 회화적 즐거움을 이끌어내는 작가의 에너지가 놀랍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방식의 작업을 추동시키는 동력, 혹은 작업의 출발 지점에 대한 막연한 의구심이 생겨나기도 한다.

그런데 정석우는 이렇게 즉각적으로 감지되는 화면의 규모나 그 위로 암시되는 거대 서사(敍事)가 실제로는 어떤 거대한 존재에 대한 막연하고 모호한 동경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작가 자신의 일상적인 경험이나 꿈과 같은 사적(私的)인 내용들을 담아내기 위한 선택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이맇게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과 주변의 사소한 사건들, 여기에서 출발하는 공상들과 같이 사적 영역에 존재하던 것들이 자신이 속해 있는 현대사회라는 거대한 구조와 맞부딪치며 파생되는 부조화, 혹은 불편한 관계를 매혹적이거나 일상적인 이미지와는 거리를 둔 거대한—두려움과 공포를 야기시키는 어떤 심리적—흐름으로 투영해내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거대한 화면을 힘차게 가로지르는 즉흥적이고 무의식적인 행위가 더해져 태초의 풍경을 드러내고, 이것이 형태적이고 내용적인 측면에서 종교적이고 신화적인 화면을 완성해내는 것이다.

이러한 정석우의 작업은 늘상 보아왔던 유형의 회화가 아니기에 한번쯤은 누구라도 관심을 보일 법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 그의 작업이 가지고 있는 미덕은 어쩌면 단순한 시각적 매력이 아닐 수도 있다. 너무나 거대하고 모호해서 막연하게만 보이는 정석우의 화면이 매혹적이고 달콤한 이미지에 투사되던 젊은 세대의 갈등과 고민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직면하기 위해 선택한 방편이었다는 것은 이러한 추측에 힘을 보탠다. 다시 말해, 정석우의 작업에 대한 흥미로운 접근을 가능하게 하는 출발점은 사실은 시각적인 것 너머에 있다는 것이다. 개인과 사회가 충돌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아의 고립과 망각, 공허와 같은 개인적 감정들을 시작도 끝도 없는,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소용돌이에 휩쓸리는 것과 같은 두려운 감정과 대치시키는 방식, 그리고 그것을 물리적으로 거대한 화면 위에 시각화해내는 그의 방식이 최근의 회화작업들이 잊고 있었던 회화적 즐거움, 나아가 회화가 던져야만 하는 질문을 되찾으려는 노력으로 읽혀질 수 있다면 말이다.

김윤경(독립기획자)